거실 책장 한 켠에는 대학생 시절의 내가 박제되어 있다. 서른줄을 훌쩍 넘긴 내겐 이제 책상이 없다. 아직도 영국에서, 미국에서, 먹물노릇해볼 거라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지만, 이제는 식탁에서 책을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편한 처지다. 그렇게 속편히 사는 놈들을 보며 농반진반 혀를 끌끌차는 지경에 이른 것을 보면, 기실 나 또한 생활인이 되었나보다. 고종석, 황현산의 평론집들을 가끔 꺼내서 읽곤 한다. 다시 읽어도 고종석의 평론들은 날카로우면서도, 한편으로 따뜻함을 잃지 않아서 좋다. 황현산의 평론집은 문장 하나하나가 수려하고, 공감을 자아낸다. 시인은 태어나고 산문가는 만들어지는 것이라지만, 그들의 칼럼이나 비평을 읽다보면 이 정도 수준의 산문가는 사실 타고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른다. 고종석..
대중문화의 힘은 공감에 있다. 고급문화로서의 순수예술이 고고하게 ‘난 당신들과 다르다’를 외친다면, 대중문화는 ‘당신들도 나와 같아.’를 정면에 내세움으로서 문화수용층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최근 ‘Chick Lit'이라고 일컬어지는, 젊은 여성들의 현실적 고민을 다룬 매체들이 주류문화의 한 부분으로 등장하였다. 대중문화의 수용자적 측면에서,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젊은 여성들이 기성문화의 주류세력으로 편입되었다는 반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 문화, 경제 다 방면에서의 여권신장은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변화를 야기하였다. 칙릿류 소설 영화가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요즘이지만, 그 시작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기록적 흥행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30대의 노처녀를 정면에 내세운 ‘브리짓 존스의 ..
혼자 자취하던 시절부터 갖고 싶었던 브레빌. 결혼 전부터 마냥 혼수로 하나 두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아내의 친구들이 돈을 모아 사주겠다하여 마다않고 구매했다. 카누를 늘 입에 달고 살다가, 결혼 후엔 캡슐커피를 늘상 마셨는데, 손수 내려먹는 커피에 대한 아쉬움이 있던 차였다. 호주 직구를 통해 처음엔 920과 글라인더를 함께 구매했는데, 배송에 3개월이 걸린다더니 막상 3개월이 지난 어제, 갑자기 가격이 올랐다며 20만원 가량 추가금액 결제를 요구했다. 직구가가 100만원 이상 싼 것을 보면 국내 유통 제품의 가격거품이 심한 것 같기는 하지만, 구매대행 업체 측엔 이미 신뢰를 상실했기에 눈물을 머금고 국내정품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문의해보니 최초 주문했던 920과 글라인더 세트가 백화점에서는 할인받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 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생을 보낸 곳은 낙동강 유역이었다. 당연스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생의 절반을 보낸 곳도 낙동강 유역이다. 이를테면 낙동강은 내게도 젖줄같은 강이다. 장인 어른도 낙동강을 보며 자랐을 것이다. 장인어른이 줄곧 의가 곧은 이들의 마을이라던, 그 집성촌의 조상들 또한 이 강을 통해 억척스런 삶을 일구어나갔으리라. 요컨대 강줄기는 집안과 집안 사이를 잇기도 한다. 아버지는 삼랑진의 물로 소의 목을 축였고, 어머니는 맥도의 물로 논에 물을 댔다. 디스토마같은 병을 알지 못했던 시절, 배가 고프면 사람들은 낙동강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공단도 농장도 없던 그 시절 강에는 먹을 것도 지천이었다. 외할머니가 담낭암을 앓게 된 것도 사실 그 때문은 아닐까 이제와 ..
우리 집은 지은 지 약 20년이 다되어가는 아파트라 입주 당시부터 손볼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화장실, 베란다는 전문 업체를 불러 타일교체, 탄성코팅 등의 공사를 했고, 방과 거실은 페인트로 도색해 살릴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살린 채 살고있다. 문제는 누렇게 변색된 인터폰. 기능상에 문제가 없고, 경비실에서 가끔 연락이 오는 일도 있으니 섵불리 교체하기도 애매했다. 플라스틱이 자외선에 노출되면 변색을 피할 수 없다. 때문에 굳이 의류가 아니고서는 모든 물건은 최대한 햇볕을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집은 햇볕이 잘드는 편이라 아무래도 변색 수준이 더 심한 듯. 인터폰의 경우도 표준화된 부품 규격이 있어서 교체하려면 해당 제조사의 호환되는 새 제품으로 교체할 수도 있지만, 비용도 비용이고, 사람을 부르는 ..
내가 사는 서초1동은, 강남역과 서초역 사이에 위치한, 업무용 오피스 건물이 밀집한 전형적인 상업지구이다. 그 중 대부분은 변호사 사무실과 병원이란게 좀 특별하달까. 서초구는 반포, 잠원, 강남역 일대 재건축 단지를 제외하고는 대단지 아파트래봐야 몇 동 되지도 않기에, 지역주민들이 찾는 동네 밥집보다는 인근 직장인들의 회식장소에 걸맞는 규모있는 고깃집, 횟집, 호프가 더 많은 것 같다. 서울교대가 주변에 있지만 대학로랄 것도 따로 없다. 조금만 걸으면 강남역이니 사실 학교 주변에서 노는 학생도 없을 것 같다. 결혼 이후로 2달이 지나도록 외식을 거의 한 적이 없는 것같아서, '나 혼자 산다'에 배우 남윤수가 맛있게 순대국을 먹는 것을 보고는 순대국을 먹으러 가기로 결정. 밀린 청소와 이불 빨래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