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봉에 즈음하여,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 Sharon Maguire, 2001)

20년만의 재개봉, 장르의 개척자가 다시 돌아왔다


대중문화의 힘은 공감에 있다. 고급문화로서의 순수예술이 고고하게 ‘난 당신들과 다르다’를 외친다면, 대중문화는 ‘당신들도 나와 같아.’를 정면에 내세움으로서 문화수용층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최근 ‘Chick Lit'이라고 일컬어지는, 젊은 여성들의 현실적 고민을 다룬 매체들이 주류문화의 한 부분으로 등장하였다. 대중문화의 수용자적 측면에서,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젊은 여성들이 기성문화의 주류세력으로 편입되었다는 반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 문화, 경제 다 방면에서의 여권신장은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변화를 야기하였다.


칙릿류 소설 영화가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요즘이지만, 그 시작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기록적 흥행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30대의 노처녀를 정면에 내세운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수많은 골드미스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로맨틱 코미디로는 보기 드물게 세계적으로도 기록적인 흥행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속편이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이러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간의 로맨틱 코미디와 다른, 당시로서는 이질적인 캐릭터상을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브리짓 존스는 과거의 수동적인 여성상과 달리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다. 브리짓 존스는 과감히 자신의 꿈을 위해 재수없는 직장상사에게 사표를 던질 용기가 있고, 실제 기자라는 꿈을 멋지게 이루어내는 알파걸이다. 또한 경제력을 갖춘 브리짓 존스에게 더 이상 결혼은 행복의 필수조건이 아닌 듯 보인다. (물론 2021년에 이른 현재, 우리는 그녀의 미래에 대해서 이미 소상히 알고있다) 과거와 다른 주체적 여성상의 제시는 그간의 로맨틱 코미디와 차별성을 두는 동시에, 30대의 뚱뚱한 노처녀라는 설정은 관객들이 브리짓 존스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공감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주체적인 여성 관객들을 타깃으로, 또 그로인한 막대한 흥행 수익을 거두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영화는 신데렐라형 이야기 구조가 주는 대리만족에 기대고 있다. ‘여성들이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라’는 영화의 외침은 현대판 왕자 마크로 인해 공염불로 그친다. 마크는 잘나가는 변호사에, 훤칠한 외모를 갖췄고, 게다가 자상하기까지 하다. 서른 넘은 뚱뚱한 노처녀를 정면에 내세워 공감을 이끌어내지만, 결국은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 그야말로 동화 속 왕자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영화는 끝난다. 이러한 현실적인 주인공의 비현실적이고 의존적인 로맨스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상당히 희석시킨다. 이러한 기존 신데렐라형 이야기 구조는 동시대 칙릿 영화 상당수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제리 맥과이어 속 사랑스러웠던 그녀는 이 영화를 위해 10kg 가량을 증량했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같은 칙릿 영화들을 단지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칙릿 류의 매체는 그간 삶과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보다는 연애나 섹스, 소비 측면이 주로 집중해왔다. 단순히 작품성이 없는 통속물 정도로만 치부되어 온 것이다. 물론 칙릿류의 매체의 소재는 통속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이야기 속에서 여성이라는 주체를 다루는 방식이다. 즉 칙릿류 매체가 그간 기성주류문화의 하위문화로서 인식되어 오던 젊은 여성들의 문화를 사회의 주류문화로 이끌어온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통속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의 가슴 속으로 이러한 소설들이 손쉽게 침투하였던 것은,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았던 젊은 여성의 현실적 고민들에 대해 담담히 어루만져주었기 때문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성공 이후로 수많은 유사한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러한 영화, 소설 속 주인공은 그야말로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 시대의 젊은 여성들이다. 단순히 통속적, 소비지향적이란 이유만으로 ‘칙릿의 홍수’를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시리즈물의 호흡이 길어지면서 브리짓 존스는 중년의 싱글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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