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드로 공항, 첫 런던의 밤

코로나 이전의 일상을 언제쯤 다시 맞이할 수 있을까. 주머니 가벼운 대학생도 조금만 용기를 내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던 시절. 대학 졸업을 즈음해서 영국에서 워킹 홀리데이 중이었던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 할 일 없으면 밥이나 먹으러 오라는 말에 솔깃. 생애 첫 유럽행을 10분 만에 결정했었다. 디지털의 세계도 전류가 세월처럼 흐르는 모양으로 풍화, 침식을 겪는다는데, 다행히 당시의 사진들이 온전히 잘 남아있다.


계획을 짜서 움직이는 것을 워낙에 귀찮아하고, 여행을 가면 무작정 걸어다니는 일이 부지기수라, 비행기와 숙소만 예약해놓고 모든 것은 가서 부딪히며 해결하기로 했었다. 비행기는 에어차이나에서 75만원에 인천 출발, 북경 경유, 런던 히드 공항 입국으로 발권했다. 출국은 알이탈리아 항공을 이용해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출국하기로 했고, 여행 중 도시간의 이동은 이지젯과 기차를 이용했다. 환승지인 북경에서는 경유 시간만 8시간이 넘어 공항 의자에서 6시간 가량 자며 비행기를 기다렸던 생각이 난다. 장거리 비행이 처음이었는데, 연착이 잦은 중국 공항을 감안하면 간 큰 행동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도 없는 환승 통로에서 장장 6시간을 자며 기다렸다



북경 공항은 그래도 편의시설이 워낙에 잘 갖추어져 있어서, 오랜 시간 환승을 기다리는 데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의자마다 콘센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베드처럼 누워 잘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8시간 가량 환승 비행기를 기다려 장장 10시간여를 날아 히드로 공항으로 입국했다. 당시의 유럽은 산발적인 테러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때문에 히드로 공항으로의 입국이 굉장히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학생 신분도 막 벗어난지라 입국 심사를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여행 목적 외의 다른 질문은 없었고, 큰 난관 없이 입국대를 통과했다. 대한민국 여권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무탈하게 입국을 하고 처음 만난 영국



당시 내가 예약한 숙소는 핌리코 근처의 한인민박이었는데, 지금 검색해보니 이미 망하고 없어진 듯 하다. 지저분하기도 했고, 주인장이 조금 재미있었던 점 빼면 크게 추천할 만한 숙소는 아니었으니. 민박집 주인장이 담배를 좋아해서 담배 2보루를 하루 숙박으로 쳐줬었다. 영국 담배는 한 갑에 만원 가까이 하던 시절이었으니, 애연가들의 경우는 담배 2보루면 수지타산에 맞고도 훨씬 남겠다 싶었다. 면세 담배는 1보루 까지 입국시에 들고 들어올 수 있다기에, 이 또한 긴장했었는데 역시나 한국, 일본인의 경우는 별다른 수색 없이 통과시켜주었다.

장장 20시간에 가까운 비행을 마치고 처음 마신 바깥 공기


런던 언더그라운드, 흔히들 튜브라고 부르는



영국은 전세계에서 지하철이 가장 먼저 뚫린 곳으로 알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런던의 지하철은 다른 여타 유럽도시에 비하면 깔끔했다. 파리와 뉴욕의 지하철을 비교하면 특히.

숙소에 도착할 무렵엔 이미 밤이 되어있었다


남녀노소 어디에서나 축구를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들의 화질이 대체적으로 좋지 않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핸드폰 이미지 센서의 기능이 워낙에 조악했던지라, 빛이 조금만 부족해도 사진이 엉망이다.


여행의 목적이 당시 런던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하고 있던 친구놈을 만나기 위해서였던지라, 좌우지간 제일 먼저 연락을 했다. 당시 친구놈은 영국살이에 꽤나 지친 모습이었는데, 만난 시간 내내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와 그에 비해 한 없이 비루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고, 내가 숙박비로 담배 2보루를 민박집 주인장에게 주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심을 담아 분노했다.(정말이지 진심이 느껴졌다) 꼴에 영국물 좀 먹었다고, 내가 식탁에 핸드폰을 잠시만 올려놔도 영국의 치안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타박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외국물 좀 먹었자고 괜스레 꼴값 떤 게 아니었나 싶다. 물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첫날 친구가 산 인도식 탄두리 치킨



피쉬앤칩스를 먹을까 하다가, 자기가 잘아는 펍에서 여행 마지막날 먹자고 하기에 테임즈강 인근의 인도식당에서 탄두리 치킨을 주문했다. 저녁은 친구가 샀는데, 저 얼토당토 않은 양과 퀄리티가 한국 돈으로 5만원이 넘었다.

테임즈강과 런던 아이



가볍게 요기를 하고는 테임즈강 주변을 함께 산책했다. 세계적인 관광지 임에도 10시가 넘은 시간에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친구놈도 런던에서는 밤이 되면 가게들도 문을 닫고, 갈 곳도, 즐길 거리도 없다며, 서울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했다. 간혹, 이슬람계 또래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했는데, 될 수 있는 한 피하려 했다. 알고보니 담배불을 좀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듯했는데, 유독 소매치기가 활개를 치던 시기라 아무리 편견 없이 바라보려해도 쉽지 않았다.

런던의 심장, 의회 권력의 상징 엘리자베스 타워, 빅벤



깊이와 재미 모두를 만족시키는 세계사 교양서적으로는 먼 나라 이웃나라 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여행을 떠나기 전, 영국, 이탈리아, 도이칠란트, 프랑스 편을 읽고 갔음에도, 파편화된 지식을 얽어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략 의회 권력이 국왕의 권력보다 전통적으로 강한 의회의 나라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과 웨스터민스터 궁전이 같은 곳인 줄 알았는데, 웨스터민스터궁 속에 웨스터민스터 사원과, 엘리자베스 타워가 함께 위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요즘은 흔히들 함께 혼용해서 쓰는 듯하다. 이는 또 영국 상원과 하원이 모두 위치해있는 국회의사당 역할을 하는 건물 정도로만 알고 갔는데, 원래는 왕궁으로도 쓰였던 곳이란다. 현재는 다들 알다시피 국왕 일가는 버킹엄 궁전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버킹엄 궁전 또한 지근거리에 있어 모두 도보로 함께 둘러보는 관광코스. 테임즈강의 남 북을 잇는 다리는 웨스터민스터 다리. 이 다리를 건너면 나이팅게일이 세웠다는 그 유명한 세인트 토마스 병원이 있다.(세인트 토마스 병원은 런던 웨스트민스터 다리 테러 사건 때 수많은 부상자를 치료한 곳이다)


그레이터 런던의 심장부를 거닐고, 숙소가 위치한 핌리코와 웨스터민스터궁은 걸어서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친구놈은 다음 날 출근을 위해 하우스 쉐어를 하던 아파트가 위치한 리버풀 스트리트 역으로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장장 26시간 이상을 깨어있었던지라, 참을 수 없는 피로가 밀려왔고, 숙소에 도착해서는 맥주 한 잔 하자는 민박집 주인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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