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트 모던에서의 하루

어김없이 흐린 하루. 숙소가 지하였던 터라 며칠 째 잔뜩 습기를 머금은 외투가 눅진하게 온 몸을 휘감는 듯했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런던. 늘상 그렇듯, 주변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며칠째 이어진 비에 몸이 천근만근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다가, 런던에 왔으니 미술관도 한 번 가보자는 마음으로 테이트 모던에 가기로 결정했다. 테이트 모던은 밀레니엄 브릿지 남단 뱅크사이드 지역에 위치한 미술관인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곳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산업혁명 시대의 공장건물을 멋들이지게 리모델링해서 미술관 건물로 쓰고 있다는 것. 더군다나 입장료도 무료라니 금상첨화였다.

해외정보를 다루는 영국 정보국 MI6, 007 영화를 통해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출발 전, 여느 때와 같이 핌리코역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자주 보았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007 시리즈에서 익히 보아왔던 영국 해외정보수집기관 MI6 건물이었다. 정보기관답게 높은 외벽 곳곳에 CCTV가 수십대 설치되어 있었다. 방첩기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라 흥미로웠다. 건물 자체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템즈강 남쪽으로 나이팅게일 병원을 향하고 있던 중, 영국 BBC 기자가 뉴스를 중계중이었다


이제 이 풍경을 보는 것도 이틀 남짓 남았다 생각하니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이팅게일 병원을 잠시 들러 구경하고, 테이트 모던에 도착했다. 가까이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웅장함. 한 때는 이 공장 굴뚝을 통해 수많은 소년공들의 젊음이 공장 매연과 함께 묻어나왔을 것이다.

테이트 모던 건물, 가까이서 촬영해 절반도 담지 못했다


파울 클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새삼 연도를 보니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방문 당시 파울 클레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스위스 화가라는 점 외에는 아무런 지식이 없어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다. 정작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역시나 그 유명한 피카소의 작품들. 테이트 모던에는 그 유명한 '우는 여인'와 '세 명의 댄스'가 전시되어 있다. 작품을 찾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니, 입구에서 팜플렛을 받아서 위치를 확인하고 가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물론 여유가 있다면 찬찬히 마음이 가는 작품 속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역시나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던 '우는 여인'



'게르니카'와 마찬가지로, '우는 여인'도 전쟁의 참상과 관련된 작품이라고만 알고 있다. 다소 난해한 인상주의 시절의 작품 임에도,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우연히 조우해 더 반가웠다. 프리다 칼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일전에 보았던 터라, 작풍만 보고도 프리다 칼로의 작품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한참을 서서 그림 속의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조형미술도 많았지만, 역시나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셍겐조약을 통해 가입국 간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다. 영국은 브렉시트 이전에도, 이후에도 셍겐조약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타 유럽 국가들에게도 출입국 절차가 비교적 까다로운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독일과 같은 이웃 국가들과의 교역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활발한 편이다. 테이트 모던 곳곳에 독일어를 쓰는 어린이들을 많았는데, 아마 독일 어린이들이 단체로 수학여행을 온 듯했다. 유라시아 대륙과 접해 있지만 철조망으로 인해 사실상 섬나라인 우리 나라와, 대서양에 둘러쌓인 섬나라 임에도 자유롭게 유럽 대륙과 왕래하는 영국의 상반된 현실이 새삼 체감되었다.

쉴새 없이 떠들고 웃던 독일의 어린이들, 어느 나라나 어린 시절은 똑같다


밀레니엄 브릿지와 비 내리는 템즈강



테이트 모던에는 템즈 강을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카페가 있다. 창가 자리는 한참을 기다려야 앉을 수 있었다.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과 함께 테이트 모던의 작품을 다루고 있는 도첩을 구매했다. 도첩 속의 작품들을 육안으로 보았을 때의 그 감정을 되새김질하며 2시간을 넘게 앉아있었다. 카푸치노의 거품도 어느덧 꺼질무렵, 날이 어두워졌다. 낯선 곳에서의 어스름은 언제나 낯선 경험이다.

템즈강은 낮보다 저녁이 더 아름답다



테이트 모던을 나와, 밀레니엄 브릿지로 향했다. 근현대 건축물이 많은 런던에서는 비교적 생경한 건축물. 새천년을 기념해 만든 다리이겠거니 하며 다리 위를 걸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을 이어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게 멋들어진 다리 위에서, 많은 커플들이 템즈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영국의 국교 성공회의 세인트 폴 대성당



성공회교의 예배당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세인트 폴 대성당도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마음 먹은대로 살지 않으면, 마음 가는대로 살게 되는 것이 삶이다.

핌리코의 펍, 풀럼의 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영국 여행 중 가장 아쉬웠던 점은, 일정이 맞지 않아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보지 못한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친구와 함께 핌리코의 한 펍을 찾았다. 인근에 첼시의 홈구장 스탬포드 브릿지가 있지만, 핌리코의 시민들은 주로 풀럼 FC의 팬인 듯 했다. 펍 곳곳에 풀럼 FC의 엠블럼이 걸려있었고, 프로젝터를 통해서도 풀럼 FC의 경기가 중계 중이었다. 이름만 익히 들어왔지 그다지 잘 알지 못했던 팀이지만, 그들과 한 마음으로 풀럼을 응원했고, 맥주 두 잔과 피쉬 앤 칩스를 주문해서는 함께 나눠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참고로 시즌이 끝난 뒤 우리가 이 날 응원했던 풀럼 FC는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어쩐지 그 날 펍에는 저게 바로 훌리건인가 싶을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이던 팬들이 많았는데, 그 시즌 풀럼의 경기력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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