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판크라스역에서 파리 북역으로
- 여행/런던
- 2021. 8. 13.
런던 1존만 돌아다닌 것 같은데 어느 덧 런던을 떠날 때가 되었다. 더 긴 일정을 잡았다면 리버풀도 가보았을텐데, 런던만으로도 5일의 일정은 촉박하고 부족했다. 내가 게으른 탓도 있지만, 박물관과 미술관만 해도 하루는 온전히 시간을 내어야 제대로 둘러볼 수 있을만큼 런던은 볼 거리, 즐길 거리가 넘친다. 숙소에서 만난 형은 뮤지컬을 하루에 한 편씩을, 다른 형은 일주일 넘게 눌러 앉아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2경기 보고 간다고 했다.
런던의 일반적인 건물들은 모두 지하에도 사람이 사는 듯 했다. 내가 묵던 숙소도 지하에 있던 터라, 지내던 내내 습기가 온 몸으로 느껴졌다. 아마 비가 그토록 오지 않았다면 조금은 지내기 수월했을 지도 모르겠다. 런던에 대한 기억은 온통 비를 맞고 다닌 기억 밖에 없다.
런던에서 파리로 가는 방법은 대개 2가지로 나뉜다. 유로스타를 타거나, 이지젯을 타거나. 비행기를 지겹도록 타고 온 터라 이번에는 유로스타를 이용해서 파리 북역으로 가는 방법을 택했다. 도버해협의 해저터널을 이용하는데, 생각보다 개통된 지는 얼마 안되었다. 94년에 개통했다니 여행 당시로서는 20년 남짓이다. 평소 같으면 또 주구장창 걸었겠지만, 백팩을 들고간 터라 걷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다. 여행 중 몇번 타지 않았던 지하철을 타고 킹스크로스 세인트 판크라스역으로 향했다.
세인트 판크라스역은 유로스타와 유라시아 열차의 기착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건축 역사에 있어 이정표를 세운 큰 의미가 있는 건물이란다. 당시로는 혁신적인 건축 기술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문외한이 뭘 알겠나. 그냥 빨간 벽돌을 예쁘게 쌓아올린 기차역이구나 했다. 킹스 크로스 세인트 판크라스 지하철역을 나오면, 세인트 판크라스역이 보인다. 같은 지하철역을 사용하지만, 킹스 크로스역은 세인트 판크라스역과는 별개의 역이다.
런던에는 곳곳에 운하가 남아있는데, 과거와 같이 수운을 이용하지 않는 현대에 와서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는 듯했다. 세인트 판크라스 기차역 인근에는 런던에서 가장 큰 운하인 리젠트 운하가 있다. 멀지 않은 거리라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스타벅스 만큼이나 런던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커피 체인점 프레자 망제(Pret A Manger)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서, 잠시 산책로 벤치에 앉아 이른 점심을 먹었다.
운하 인근으로는 형형색색의 보트들이 정박해있었는데,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듯, 세간살림이 잔뜩 들어찬 보트들도 있었다. 흔히들 '보트 피플'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사는 '내로 보트'인데, 런던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이렇게 런던 토박이들이 보트 피플로 내쫓긴 사례가 많다고 한다. 내로 보트는 대략 2000만원에서 4000만원 사이면 살 수 있고, 런던의 일반적인 아파트의 평균 월세는 한화 3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허드슨 강이 보이는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보다 비싸다는데, 우리나라도 머지 않아 한강변에 수많은 한국형 내로 보트들이 정박해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해리포터의 모험이 세인트 판크라스역과 붙어 있는 킹스 크로스역의 9와 ¾ 승강장에서 시작되었다. 운하를 나와 킹스 크로스역의 해리포터 기념품점에서 기념품이나 사가자 싶어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해리포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승강장을 소설과 같은 모습으로 구현해놓았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으며 자란 다양한 국적의 남녀노소가 기념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세대를 전승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것이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어릴 적 동심을 추억하며 킹스 크로스역을 찾을 것이다.
출국 스탬프에 도장을 찍고, 승강장 안에서 잠시 책을 읽으니 파리 북역행 유로스타가 도착했다. 런던에서 도버해협을 건너 파리까지 닿는 시간은 대략 2시간 30분 가량. 옆 자리에 앉은 프랑스인은 익숙한 듯 엉덩이가 닿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런던의 마지막 한 순간까지 기억 속에 담고 싶었던 나는 한 순간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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