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오래 전 폐지된 예능프로그램 '짝'의 클립 영상을 봤다. '짝'은 짝짓기라는 포맷을 차치하고서라도 다양한 인간군상의 민낯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프로그램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출연자는 짝에서도 레전드라 평가받는 애정촌 10기 남자 6호 형님으로, 언뜻 보기에도 인간미가 넘치다 못해 솟구치는 분이시다. 그 형님이 한 말씀 중 인상깊은 구절이 있다. 남자 6호의 직업은 소나 말과 같은 산업동물을 진료하는 대동물 수의사였는데, 인터뷰 곳곳에서 느껴지는 동물에 대한 애정과 직업적 소명의식 또한 감동적이었지만, 특히 경제논리를 언급한 대목에서는 동물과의 당시 내 상황과 관련해 특히 눈이 갔다. 요지는 이렇다.
"수많은 가축들이 경제학적 논리에 의해 죽어갑니다. 애완동물과는 달리 가축의 매매가격보다 비싼 치료비용을 부담할 농장주는 많지 않으니까요. 구제역이라도 터지면 말할 것도 없지요. 대부분의 동물들이 한 번의 오진만으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못받고 죽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때로는 제 스스로가 차라리 용한 점쟁이 였으면 할 때가 많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의 고통을 그 소리만 듣고도 알아챌 수 있게 해달라구요."
당시 나는 길고양이를 임시보호하고 있던 중이었다. 비 오는 날 먹이를 한 번 준 것을 계기로 길고양이가 자꾸 반지하 창문 방충망을 긁어대며 내 방으로 들어오려는 통에, 결국 팔자에 없는 동거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없는 돈에 예방접종 등 모든 필요한 조치를 하고 입양을 보내며 짧은 동거 생활은 끝이 났다. 3개월 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때의 경험은 동물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감이 깊어질수록, 모순을 느끼는 일이 많아졌고, 언젠가부터 당연하다고 느껴왔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됐다.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어느 순간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는 것조차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동물권 논의의 시작은 미국에서 1970년대에 피터 싱어 교수의 '동물해방' 출판을 통해서였다. 시대적 배경만 보아도 당시의 논의는 보다 극단적이었으리라 내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차별에 저항하던 히피문화의 저변이 종차별에 까지 이른 것이다. 권리란 결국 의무와 당위를 뜻하고, 이는 동물을 다루는 것이 단순한 호오의 영역을 벗어남을 뜻한다. 그리고 그러한 권리가 인정되는 순간, 사회,경제,문화 전 영역에서 인류 생활 양태를 바꾸어버릴 다양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인류의 먹고사니즘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한, 근래 동물권이 헌법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지만 언젠가 동물권 또한 보다 큰 논쟁거리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인간은 측은지심의 본성을 타고 났고, 과학 기술의 진보는 모든 영역을 포섭할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언젠가 원고 '똘이', 법정대리인 '견주'인 손해배상 소송을 보게 될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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