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동창 B에 대한 기억

그 친구는 언제나 성실했다. 노력에 비해 성적이 잘 나오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치지 않고 늘 우직하게 공부했기에, 유독 우등생이 많았던 우리 학년에서도 그 친구는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본디 좋은 머리를 타고났던, 최상위권 친구들 몇몇은 자기네의 몇곱절을 노력해도 늘 제자리 걸음인 그 친구를 비웃곤했다.


그 친구는 나태해지려 할 때마다 늘 모멸감을 되새김질하며 절치부심했다. 아마도 결과로써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으리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 친구의 올곧은 성정은, 열등감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게 하는 뿌리였다. 정글같던 사춘기 수컷들의 세계에서도 그 친구는 비뚫어지지도, 꺾이지도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살았다. 하지만 유독 간이 작아 시험장에만 가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수능시험장에서 모의고사에서조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점수를 받고 말았다.


그 친구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유독 하늘에 관한 사진이 많았다. 언젠가 운동장에서 함께 농구를 하던 중, 우연히 목표로 하는 대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친구는 내게 하늘이 좋아 공군사관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공군사관학교도, 지망하던 대학도 모두 낙방하고, 그 친구는 지방 국립대학의 대기과학과에 진학했다. 내가 군입대를 하며 자연스레 연락이 끊어졌고, 간간히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통해서만 소식을 알게 되었다. 지방대학이라 꿈을 펼치기 힘들 것이라는 주위의 편견어린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그 친구는 역시나 꿈을 향해 꾸준히 정진했다.


군전역 후 한동안 그 친구에 대해 잊고살다가, 어느 날 다른 친구를 통해 그 친구가 국내 최고 사립대학의 대기과학과로 편입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모처럼 들어간 그 친구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편입 성공에 대한 자찬에 더해,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 좋은 연구자가 되겠노라는 결기어린 다짐의 변이 남겨져 있었다.


어느덧 대학을 졸업할 시기가 되자, 그 친구는 더 깊이 있는 배움을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난생 처음 배우는 낯선 언어와 악전고투하며, 빙하를 통해 수만년 전의 대기 변화를 측정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 뒤로 5년이 지난 오늘. 우연히 그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찾게 되었다. "어떠한 미련도 남겨놓지 않고 몸뚱이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자조섞인 일기가, 파리의 밤 거리를 찍은 사진과 함께 남겨져 있었다. 1년 전 남겨진 그 게시물을 끝으로 더 이상의 게시물은 없었다.


돌이켜보았을 때 고등학생 시절의 그 친구에게서 다른 우등생들에게서 보았던 번뜩이는 재치나, 날카로운 지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친구는 쉬는 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가끔은 미련해보일 정도로 공부에만 몰두하던, 돌부처와 같은 모습으로 내게 기억되고 있다.


대학입시도, 박사학위도 모두 바람대로 한 번에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친구가 다시금 연구자로서의 인생 제 2막을 맞이할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몇 번을 넘어지고 무릎꿇어도 신발끈을 고쳐매는, 실패에 대한 내성이야 말로 좋은 연구자의 자질이기에, 거센 비바람에도 정좌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돌부처처럼 그 친구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 친구는 얼마전 다시 일본에서 새로이 학위과정을 시작했다. 도전이 두려워지는 나이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한다. 늦깎이로 불혹이 다되어서야 학위를 받을 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떠랴. 남들보다 빠르진 못했을지언정, 그랬기에 더 멀리갈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인생은 길고, 우리는 아직 시작조차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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