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서점

구글에서 찾은 뿌리서점 사진. 당시엔 건강하셨던 주인장 할아버지께서 늘 진한 믹스커피 한 잔을 주셨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앞 헌책방에 수학의 정석을 팔러갔었다. 혹여 누가 훔쳐갈까 싶어 써놓았던 이름만 빼면 흠잡을 곳 없는 새책이었는데도, 제 값의 반도 못받는 것이 야속해 그냥 나왔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 1학년 때 데즈카 오사무의 <붓다>시리즈가 보고 싶었다. 인터넷을 보니 헌책방을 다니면 운좋게 구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청계천가에 헌책방이 꽤 있었는데, 어딜 가도 구할 수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서울지리에, 땡볕에 진창 고생만 했던 기억이다.


다시 헌책방을 찾은 것도 오년전. 졸업시기를 훌쩍 넘긴 무늬만 졸업준비생 시절이었다. 넘치는게 시간이고, 쪼들리는게 돈인지라 인근에 뿌리서점이 있어 한 번 들러본 것이다. 낡은 책 속에 있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만, 눅진한 지하공기에 여름이면 책향기가 곰삭는 곳이라, 아직도 그 냄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듯했다.


그 뒤로 다시 꽤 많은 시간이 지났고, 나는 취업을 하고, 결혼을 했다. 그 사이에 주인장 할아버지께서는 몸이 편찮으신지 책방을 아들에게 넘기셨다고 들었다. 늘 인자한 웃음으로 진한 믹스커피 한 잔을 내어주시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마도 알라딘 같은 대형 서점들까지 중고책 시장에 진출한 마당이니, 운영도 예전같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게 찾아도 구할 수 없었던 데즈카 오사무의 <붓다>가 양장본으로 다시 나온 지도 모르고 살았다. 거실 식탁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며, 빳빳한 새 책을 펼쳐들고 모처럼 다시 그 여름날을 생각해본다. 이 책 속엔 누군가 귤을 먹다 흘린 자국도, 변색도 파본도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을, 그 여름날 그 고생을 했구나 싶어 못내 웃음이 난다. 낡은 것들 속엔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이번 가을에는, 다시 한 번 뿌리서점에 가봐야겠다.



※흙서점, 뿌리서점, 풀무질... 헌 책방 사장님들의 작명센스는 정말이지 언제 봐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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