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것들에 대한 예찬(Grand Seiko, 57gs)

쿼츠 무브먼트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보다 어쩌면 더 큰 시계 산업의 변화가 올 것 같다. 내 주변만 봐도 쿼츠는 고사하고, 흔히 보이던 G-shock 같은 전자시계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스마트워치는 전화, 문자는 기본이고, GPS를 이용한 고도 측정에, 심지어 헬스앱에 연동하면 혈당과 혈압도 측정이 가능하단다. 이진법의 세상이 가져다주는 무한한 확장성이 놀랍다. 시계 판매량에서 스와치그룹을 제치고 애플이 압도적 1위를 했다는 기사도 언뜻 본 것 같다. 이제 시계 산업의 수도는 제네바, 취리히가 아니라 실리콘 밸리 일런지도 모른다.


물건에 관한 한 나는 늘 한 발짝 느린 편이었다. 모두가 전자시계를 차고 다니던 군시절에도 굳이 홍콩독수리라 불리던 쿼츠 시계를, 전역 이후에는 매뉴얼 무브먼트의 태엽 소리에 빠져들었다.(사실 요즘은 쿼츠 시계를 다시 차고 다닌다)
속칭 '롤까오'같은 하이엔드급 시계를 새 것으로 사기엔 엄두도 내지 못해서, 곤궁하던 나는 ebay나 amazon 같은 경매 사이트에서 빈티지 시계를 구경하는 것이 취미였다. 여행차 방문했던 런던에서도 시간이 남으면 빈티지 시계점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십 년 전의 군용 시계들을 구경하며 여행지에서의 낯선 지루함을 해소하곤 했었다. 그 곳에는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도 있었고, 포클랜드의 영국군도 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 시계를 사모으다, 어쩌다 손에 들어온 것이 Grand Seiko의 초기 모델인 57gs. 아마도 60년도 더 된 시계로 알고 있다. 금도장이 멋들어졌던 사자배꼽은 이제 세월에 풍화되어 검게 변해버렸다. 문자판의 테두리도 수십 년의 장마를 이기지 못하고, 습기에 변색되어 버렸다. 문자판을 예지동에 맡겨 재생을 해볼까, 깊은 상처들을 그라인더로 갈아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상처 하나하나가 세월을 이겨온 훈장처럼 느껴져서 마냥 보기 싫지만은 않다. 낡은 것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고,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번쩍번쩍한 새 것에서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게다가, 매뉴얼 와인딩 방식이라 흔히들 '밥을 준다'고 표현하는 와인딩을 주기적으로 해줘야 하는데, 조그만 게을리해도 시계가 멈춰버린다. "대우해주는 만큼만 일하겠다"는 장인의 투쟁 방식은 또 얼마나 올곧은가.


딸깍발이 영감같은 이 낡은 시계가 어떤 사연이 있어 대한해협을 건너 이 곳까지 온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누군가의 결혼 예물이었을지도, 전후시대 어렵사리 첫 직장에 입사해 받은 취업 선물일지도 모른다. 분명 누군가에겐 한 없이 소중했을지도 모르는 물건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어떤 불효 막심한 아들놈이 용돈이 필요해서 아버지 몰래 이를 팔아버린 걸까.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Grand Seiko 57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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