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하루(My dear enemy, 이윤기, 2008) 블루레이

틈틈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한 켠에서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은 아쉬움이 남아서.


이윤기 감독의 '멋진하루'는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 중 하나. 돌이켜보면 2000년대 후반에는 좋은 영화들이 많았다. 완성도만큼 주목받지 못해 아쉬운 영화들도 그만큼 많았고. '멋진하루'는 그래도 아직까지도 꽤나 많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을 보면, 운이 좋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김씨 표류기'도 참 좋아하는 작품인데, 이제서야 imdb 같은 사이트에서 뒤늦게 호평을 받는 것을 보면, 한 영화의 운명도 운칠기삼으로, 한 사람의 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고보면 예전에는 음반, DVD 같은 작은 것들에 대한 소유욕이 꽤나 있었는데, 나이를 먹으니 그마저도 없어졌다. 유튜브를 통해 제 3세계의 인디 뮤지션의 곡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고, 왓챠나 넷플릭스를 통해 찾기 힘들었던 고전 영화도 블루레이 화질로 볼 수 있게 됐다. 염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기에, 오히려 더 불감의 시대를 살고 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랄까. 진득하게 영화 한편 보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일 줄이야.


'멋진하루' 블루레이는 4년 전쯤 샀던 것 같은데, 아직도 구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플레이스테이션을 통해 가끔 돌려보곤 하다가, 왓챠, 넷플릭스같은 OTT가 일상이 되자 잊고 살았다. '멋진하루'도 왓챠에 몇 번 올라왔던 듯한다.

블루레이 커버, 케이스


포스터 축소판도 동봉되어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옛 연인인 '병운'에게 여주인공인 '희수'가 빌려준 돈 350만원을 받기 위해 찾아오고, 이들이 하루라는 시간을 함께 동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영화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350만원이라는 돈을 구차하게 나마 받을 수 밖에 없는 '희수'가 처한 상황과, 그 대척점에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여전히 대책없는 삶을 살면서도 낙천적인 '병운'의 상황을 대비시키며 때로는 긴장과 균열을, 때로는 공감을 느끼게 한다.

'멋진하루' 속 대화의 대부분은 이런 식



블루레이는 으레 그렇듯, 연출진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인터뷰가 실려있고, 축소판 포스터가 한 장 들어있다. 북클릿 속에는 연출진이 가장 좋아하는 씬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나는 용산 도서관 인근에서의 씬을 가장 사랑한다. 블루레이를 살 당시, 용산도서관으로 친구와 공부를 하러 다니던 겨울이었는데, 그 거리 특유의 질감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멋진하루'는 대부분을 자연 조명을 통해 촬영했다고 한다)


이윤기 감독은, 저 북클릿 속의 장면을, 김정범 음악감독은 '희수'가 결국 돈을 다 받아내지 못하고 돌아서는 이후의 장면을, 최상호 촬영감독은 '병운'이 마트에서 일하는 싱글맘에게 돈을 빌리러 갔던 장면을 꼽았다. 이렇듯 저마다 다른 장면을 최고로 꼽은 것은 그만큼 이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들이 저마다 빛나고 있기 때문이리라.

주인공 '병운'과 '희수'


"오늘 하루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어" 일상의 사소함에서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에 관해



이윤기 감독의 후일담으로, '병운'은 결국 돈을 모두 갚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빚이 사라지면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 그 채무에 관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희수와 또 다시 재회했을 것이라고. 또한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로맨스의 완성이 아닌 마음의 평화이고, 그래서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일상의 사소함에서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에 관한 영화", 이윤기 감독이 스스로 말한 '멋진하루'라는 영화의 정의인데, 이윤기 감독이 영화적 배경을 서울, 그리고 그 중에서도 용산 일대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용산은 지금보다도 더 빈곤과 풍요가, 첨단과 전통이 혼재하는 독특한 풍경의 도시였다. 이번 겨울이 가기 전 '병운'과 함께 다시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2008년의 소월길을 걸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블루레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 하나, '병운'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윤기 감독의 옛 친구의 이름이라고 한다. 잊혀져가는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영화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그들의 이름으로 기억하려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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