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그리피스 천문대, 그리고 의도치않은 올림픽 경찰서 방문
- 여행/로스엔젤레스
- 2021. 4. 27.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거의 이틀밤을 꼴딱 새고서는, 그래도 한 군데라도 더 구경해야 되지 않겠냐는 친구의 말에 간단히 요기를 하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숙소 근처에 있던 그리피스 천문대. 원래 유명한 곳이지만, 지금은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의 댄스신으로 인해 더 유명해진 곳.
그리피스 천문대는 헐리웃 인근의 세계적인 부촌 지역의 인근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천문대 인근에는 주차할 공간이 없었다. 덕분에 십여분을 헤매다 산중턱의 인적드문 도로에 주차했고, 결국 이 결정이 화근이었다.
그리피스 천문대 폐장 시간 직전, 20분여의 짧은 시간 구경을 마치고 다시 차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차창을 깨고 친구의 가방을 털어가버렸던 것이다. 가방 속에는 여권과 2천 달러가 넘는 현찰이 들어 있었다. 금전적 피해는 차치하고, 여권 재발급을 위해 영사관을 방문하려면, 예약해둔 일정 모두가 틀어지는 상황이었다. 여로모로 당황스러웠다.
급한대로 영사관에 전화를 해서 긴급영사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범죄로 인해 구금되었을 경우, 신체에 심각한 상해를 입은 경우가 아닌 경우 등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대화 말미에는 "여기는 이런 사소한 일로 전화하는 곳이 아니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총기사고, 강도 등이 많은 미국의 치안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도 가지만, 대사관의 응대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해결해야할 일이 많았기에 참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영사관 직원의 응대는 화가 난다.
한국에서의 일반적인 처리 절차대로, 로밍해서 간 핸드폰을 통해 911에 전화를 했다. 친구는 경비를 아낀다고 현지 유심칩을 저렴하게 한국에서 구매해 갔었는데, 산중턱에서 전화가 잘 터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SKT의 해외로밍을 신청하고 갔던 내 핸드폰은 다행히 통화가 되었다. 하루에 만원 정도였나, 왜 애먼 데 돈을 낭비하냐는 친구의 핀잔을 듣고도 신청했던 것인데, 결국 필요할 때 요긴했다. 알아듣기 힘든 접수요원의 영어응대 중에, 어렴풋이 통역을 원하냐는 말을 알아듣고 통역을 신청했지만, 로밍해간 전화기가 자꾸 끊어져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자 자꾸 최초 통화했던 119 접수요원이 재차 응대한 덕분에 몇 차례 시도 끝에 911 접수도 포기.
전화를 끊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굳이 범죄 신고의 경우에는 어느 나라나 관할 불문 접수를 받을 것이고, 규모가 큰 LA 한인타운 내의 경찰서에는 한국계 경찰들이 근무하고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조금은 거리가 있지만, 가까운 헐리웃 지역관서보다는 한인 타운의 경찰서를 방문하기로 결정. 우리가 간 곳은 올림픽 경찰서라는 곳이다.(이후 소식을 전해들으니, 이 곳도 예산 문제로 폐쇄를 고려하고 있고, 지역 내 한인의원들이 이를 막기 위해 노력 중이라 한다)
사실 말하기, 쓰기는 한국에서의 영어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현지인과의 대화에서는 대부분 듣기가 문제다. 다행히 올림픽 경찰서에 한국인 이민 3세가 근무하고 있었고, 보험처리를 위한 도난확인서를 발급해줬다. 한국에서라면 접수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워낙에 이런 일이 많고, 허술하게 차량 내에 귀중품을 두고 내린 우리의 잘못이라는 식으로 사건 접수는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차피 못잡는다나. 추가적으로 피해진술도 어렵고, 차량 반납도 해야하는데 감식 등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 같아 포기.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차량을 확인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차량의 후면 유리가 완전 파손된 상태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국제운전면허증까지 홀라당 다 털리는 바람에, 운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외국인의 임시면허증은 운행 중 소지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사소한 위반의 경우에도 현지 경찰관이 운전면허증 제시를 요구할 경우 운전면허증 미소지로 처분을 받을 수 있다. 가뜩이나 고압적인 미국 경찰관들의 태도를 고려해 결국 렌트카는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우리의 모든 일정이 틀어져버린 순간이었다.
우리가 빌린 내셔널사에서는 차량을 보지도 않고, 보험 가입 내역을 확인하고는 차량을 인수해갔는데, 첫 날 대여할 때 본 직원이 우리의 하소연을 듣고는 "LA를 대표해 사과한다"고 했다. 우리도 우리의 허술함에 대해 반성하고 있던 터라, "그리피스 천문대는 끝내줬다, 그거 하나라도 봤으니 다행"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렌트카로 그랜드 캐년까지 가기로 하고 10일 가량을 렌트했는데, 결국 하루만에 반납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가방을 두고 내린 친구는 백만원이 넘는 수수료를 자기가 다 계산하겠노라 했지만, 안이했던 것이 어디 그 친구 뿐이랴. 훗날 술안주 삼을 이야기가 늘었다 생각하라며 위로하고 넘어갔지만, 가슴 한 켠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풀커버로 보험을 가입해둔 덕택에, 첫날 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렌트 비용을 환급받을 수 있었다는 것. 결국 방문하지 못했던 나머지 4일분의 숙소비용은 위약금으로 허공에 날려버린 샘이었지만. 아무튼 현지 사정에 익숙치 않다면, 렌트카의 경우 가능한 한 대형 업체로, 또 풀 커버의 보험 가입을 추천한다. 해외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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